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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이어 미래를 여는

전통문화유산의 조사연구를 통해 미래사회를 이끌어 갈 정신적 좌표를 확립하기 위하여 설립된 국학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국학의 진흥

유형문화재 제 314호, 양양금

풍산김씨, 세전서화첩

유형문화재 제 501호, 임계계회도

유교책판



팝업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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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탁소식

2021. 2∼4월 기탁현황 □ 『서파유고(西坡遺稿)』 초고 서파 류필영(柳必永, 1841~1924)의 시문집 초고본이다. 문집 교정본인 초고본과 등서본(謄書本)이 함께 전해져서, 기존에 영인본으로 발간된 『서파문집』 13책과의 비교 검토를 하는데 유용할 것으로 보인다. 문집의 체제는 대체로 시(詩), 서(書), 만제문이나 묘갈명 등의 부록으로 구성된 영남 사림의 문집과 크게 다르지 않다. 류필영은 아들인 동산(東山) 류인식(柳寅植)과 함께 한말의 독립운동에 적지 않은 역할을 끼쳤다. 1919년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한 뒤에 ‘남곽북류(南郭北柳)’라 하여 남쪽에는 곽종석(郭鍾錫)이 북쪽에는 류필영이라고 칭송되었다. 고조부 삼산(三山) 류정원(柳正源)과 스승 류치명(류치명) 등의 학문적 전통을 이어받아 영남의 문맥을 이어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전주류씨 서파후손가 기탁)       □ <나암정기(羅菴亭記)> 현판 <나암정기>는 1905년에 금부도사 류도헌(柳道獻, 1835~1909)이 성주이씨 문중의 유계소(儒稧所)인 나암정을 기념하고자 지은 기문이다. 본래 나암(蘿菴) 이문흥(李文興, 1415~1495)과 연경당(燕敬堂) 이구(李構, 1484~1536)를 배향한 오현사가 있었는데, 1868년에 훼철되었다. 이에 새로 선대를 추모하는 재실을 마련하여, 연경당을 게액하였다. 이문흥은 성균관 사성으로 전임되어 이후 20년간 유생들의 교육에 몰두하여 인재 육성의 공로를 포상받았고, 이구는 靜庵 趙光祖와 도의지교를 맺었으니, 기묘사화를 기점으로 낙향하여 학문에 힘썼다. 이들은 경북 예천군 용궁면 월오리에 있는 기천서원(箕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성주이씨 나암정종회 기탁)   □ 『오효자사실(吳孝子事實)』 <오효자사실>은 김산 유생들이 공의를 모아 오석필(吳碩弼)의 효행을 정려받기 위해 관에 올린 상서 등을 정서(正書)하여 묶은 성책이다. 기사년에 차산거사(此山居士) 황일원(黃一元)이 찬한 <오효자전> 1편, 무진년(1868)에 유생 정필(鄭馝) 등이 김산 군수 류치윤(柳致潤)에게 올린 상서, 동년에 어사(御史) 이용직(李容直)에게 올린 상서 등 관련 문서 4편이 정서되어 있다. 관에 올려 판결문을 받은 관련 문서[8매]가 함께 보존되어 있다. 오효자의 효행에 대한 정려가 수용되지는 못했으나, 고종(高宗) 대에 국가의 효자 정려 정책을 살필 수 있는 의미있는 자료이다. (해주오씨 교위공파 오인환家 기탁)     □ 『선고유계(先考遺戒)』 <선고유계(先考遺戒>는 신사년(1761) 6월 22일에 삼석재(三惜齋) 조세봉(曺世鳳, ?~1761)이 자손에게 남긴 유계이다. ‘봉계가장(鳳溪家藏)’이라는 표제에 구암(久庵) 윤봉구(尹鳳九, 1683~1767)가 83세에 쓴 ‘봉계가장’ 大字 글씨와 삼석재의 유언인 <선고유계>, 윤봉구의 <서삼석재조명보유계후(書三惜齋曺鳴甫遺戒後)>, 석문(石門) 윤봉오(尹鳳五, 1688~1769)의 <삼석재조공유계발(三惜齋曺公遺戒跋)>, <계석와조공[부]묘지명(繼惜窩曺公[雨+溥]墓誌銘)>이 차례대로 수록되어 있다. 조세봉은 임종이 가까워지가 아들 조부를 불러 ‘선대의 덕을 기릴 것, 학업에 부지런히 할 것, 효제를 돈독히 숭상할 것, 한결같이 화락하여, 조상에게 욕됨이 없어야 한다.[追思先德, 勤勉學業, 敦尙孝悌, 一心和樂, 無忝所生.]’라는 내용을 받아 적게 하였다. 위의 유계는 을유년(1765) 4월에 曺[雨+溥](1711~1778)가 선친의 유계를 기리고자 글씨와 발문을 받아 장첩한 것으로 짐작된다. (창녕조씨 매계문중 조지환家 기탁)     □ 1868년 병조(兵曹) 순장차하(巡將差下) 공명관문(空名關文)  위의 문서는 1868년 병조에서 순장(巡將)을 임명할 수 있는 공명첩을 관찰사에게 주어 도내(道內)에서 팔수 있게 만든 공명이다. ‘병조에서 도내에 사는 아무개를 순장에 임명하였으니 서울로 올라와서 직임을 살피라는 뜻을 해당 고을에 알려주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공명첩은 조선시대 수취자의 이름을 기재하지 않은 임명장으로, 납속첩(納粟帖)이라고도 했다. 주로 전쟁이나 기근, 흉년, 대규모 토목공사 등의 이유로 국가재정이 심각한 상황에서 발행되었다. 이 문서는 19세기 후반 국가의 재정확보 방안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창녕조씨 매계문중 조지환家 기탁)     2021-05-27